시 근저에 흐르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애환, 동양적인 人倫主義에 영향을 주었다.
대표작으로 <낭만의 봄>(창조, 1920) <먼후일>(학생계, 1920) <금잔디><엄마야 누나야><달맞이>(개벽, 1922) 첫 시집<진달래꽃>(1925) <옷과 자유와 자유>(백치, 1928) 《소월시초》(1939) 시론 <詩魂> 등이 있다. 권영진, 『한국현대
시인으로 인정받고 있다. 미인박명(美人薄命)이라는 말이 있듯이 김소월 처럼 뛰어난 시인이 오래 살아 주옥과 같은 불멸의 작품을 계속 창작했으면 좋겠지만 32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하여 많은 사람들의 애도물결이 이어지고 있다. 이 장에서는 현대시론3공통) 다음 시집 중 한 권을 선택 -진달래꽃-하
서정주가 1위, ‘정지용시집’(45명), ‘백록담’(20명) 등 총 65명의 지지를 얻은 정지용이 2위였다.
어떤 시대에, 어떤 세상에
1930년대의 구원자
한국현대시의 아버지
정지용
혼란한 1920년도를 정화 한용운, 김소월
40년대~90년대에 이르는 넓고 활발한 활동
친일행적에도 불구하고
한국 최고
시사에 내재적으로 흐르는 전통적 감수성을 확보했다는 데서 차이가 발견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김소월은 낭만성을 유지하면서도 이를 민족적인 동일성으로 환치하여 전통적인 율조로 보편화시켰던 것이다. 후기시는 초기시와 변화된 모습을 보여준다. 당시 민족주의파가 시조부흥론이나 민요시 운
시적 형식이나 시적 운율 면에서 좀 더 자유시에 대한 인식이 두드러지게 드러나고 있다. 하지만 김억 자신은 운율과 호흡이란 것으로 자유로운 형식을 추구한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작품을 살펴보면『해파리의 노래』의 그 수준을 뛰어넘은 이상으로 끌어 올리지는 못하고 결국 나중엔 민요시나 동요
시조부흥운동은 시조 시학을 성립하여 시조의 시적 창작 활동을 활발히 했다. 특히 이병기는 시조를 하나의 문학 형식으로 인식하고자 하였기 때문에 전통 시조 연구에 새로운 시야를 제공할 수 있었다.
3. 1930년대의 시적 경향
1930년대는 여로 모로 순수 서정의 시대였다. 한국의 현대시에서 시적
시스해 주었다. 素月의 시는 단지 많이 읽혔을 뿐만 아니라 조남익, 『한국현대시 해설』, 미래문화사, 1992, 117쪽. 『진달래꽃』(1925)과 『소월 詩抄』(1939)에 수록된 소월의 시들은 그동안 약 40여 종류의 여러 이름으로 간행되었고, 그 발행 부수가 10만 부에서 최고 20만 부까지 될 것으로 추산된다. 소월
김소월의 마음을 읽을 수 있다.
4연에서는 3연의 내용을 반전시키고 있다. 김소월은 3연에 방황하는 마음이 황송한 심정임을 고백한다. 주위 동료들의 기대감을 충족시켜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의 표출이다. 하지만 마지막 행에서 온 새벽의 이러한 모습이 소월 자신이 인식한 한국 농촌의 모습임을 보
시하면서 한국인에게 새로운 비전을 보여 주어야 할 의무를 가지게 되는데, 이것은 새로운 시형의 탐구로 이어졌다. 새로운 형식을 찾는다는 것은 식민지 초기의 시인들의 중요한 임무였다. 본고에서는 식민지 현실과 같은 시대적 특징을 바탕으로 20년대 시의 특징을 주요한, 김소월, 한용운을 중심으
진달래꽃」,「금잔디」,「엄마야 누나야」,「먼 후일」등을 잇달아 발표했다. 1924년 고향으로 돌아가 조부의 광산일을 돕는 한편, 김동인, 김억, 전영택, 김찬영 등과 《靈臺》동인으로 활약한다. 1925년 남산리에 있는 그의 몫의 땅을 모두 팔아 처가가 있는 곳으로 이사하고 동아일보 지국을 개설하고